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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 노래는 그 주인에게로 돌아간다

 

김현식.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25년이 흘렀다. 그 숱한 경험이 증명하듯, 세월이란 본디 망자의 편이 아니다. 날이 갈수록 기억은 흐릿해지고 희미해지기 마련이니까. 허나 모든 걸 일반화하기란 불가능한 법이다. 세월을 뚫고 더욱 선명해지고 아련해지는 목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직관적으로 김정호와 유재하가 떠오른다. 하지만 ‘김현식’이라는 세 글자처럼 한국대중음악사에 뜨겁고 강렬하게 새겨진 이름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활동기간은 길게 잡아야 10년 남짓이다. 락과 포크, 디스코, 블루스를 의욕적으로 불러 제낀 1집이 나온 시점이 1980년이었고, 간경화로 영면에 든 시점이 1990년 11월 1일이니 그 기간이 한 사람의 일대기를 영구히 각인하기에 충분하다곤 단언치 못한다. 하지만 다음 해 선장을 잃은 노래 ‘내 사랑 내 곁에’가 가요프로그램 순위 1위를 차지하며 전국의 레코드점에서 울려 퍼졌을 때, 가수 김현식의 여정은 마니아와 언더그라운드 팬의 품을 뚫고, 일반 대중들의 마음을 뒤흔들 대격변을 마침내 완성해낸다.

물론 그 과정엔 더 많은 음악들이 있다. 흔히 3집(1986)을 먼저 언급하지만, 그 전에 한국 언더그라운드의 인큐베이터 동아기획에 스카우트된 이후 만든 2집(1984)의 존재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를 호소력 짙은 유망주 레벨에서, 일약 ‘주목해야 할 시선’의 위치로 격상시킨 타이틀곡 ‘사랑했어요’, 20대 중반이 불렀다고는 도무지 상상하기 힘든 짙은 페이소스 ‘어둠 그 별빛’, 한국형 블루스의 단초를 보여주는 트랙 ‘바람인줄 알았는데’ 등이 수록된 이 앨범은 때론 예술가에게 도약보다 비약이 앞설 수 있다는 걸 가장 정확히 증거하는 예시로 남았다.

동시에 김현식은 정체되는 걸 온몸으로 거부하는 음악인이었다. 그는 아티스트는 항상 발빠르게 움직여야 한다는 점을, 그러기 위해선 혼자만의 힘으로는 벅차다는 걸 잘 깨우치고 있었다. 한국대중음악의 불멸의 명반으로 꼽히는 3집(1986)이 김종진(기타), 전태관(드럼), 장기호(베이스), 유재하(키보드), 그리고 박성식(유재하의 뒤를 이은 키보드)으로 이뤄진 밴드 ‘봄여름가을겨울’과 함께 탄생한 건 당연한 귀결이었던 것이다. 음악인으로서 그는 언제나 한쪽 끝이 열린 사람이었고, 장르와 장르를 먹어치우는 포식자였다. 한국 블루스의 찬란한 금자탑 ‘빗속의 연가’(김현식 곡), 한국 최고의 재능이 선사한 우수어린 발라드 ‘가리워진 길’(유재하 곡), 계보를 잃은 독자적 포크락 ‘슬퍼하지 말아요’(김현식 곡), 음반의 시그니처 송 ‘비처럼 음악처럼’(박성식) 등 명곡 퍼레이드의 단편만으로도 우리는 그 재능의 일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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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문제와 가족문제, 멤버 간 불화가 지속되면서 그는 밴드 없이 4집(1988)을 공개한다. 이정선의 곡 ‘한밤중에’, 김현식과 송병준이 작사를 하고 송병준이 곡을 쓴 ‘언제나 그대 내 곁에’, 일련의 하모니카 키드들을 양산해낸 ‘한국사람’이 주는 소리의 경관은 멋진 팝을 들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감성으로 리스너들을 인도한다. 그것을 ‘한국적 감수성’ 정도로 표현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를 전후로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는 그 이후로 상당히 길게 그의 곁을 지배하게 된다. 음반의 유일한 밝은 노래 ‘우리네 인생’(이정선 곡)조차도 분위기 반전에 실패하고야 마니. “가다보면 무얼 만나게 될까… 새옹지마처럼 아무도 몰라…”. 이 노래의 가사가 실은 더 많은 걸 함축하고 있었다는 걸 우리는 몇 년 후에야 알게 된다.

그렇게 생과 사의 선상에서 그는 5집(1990)을 내놓는다. 오프닝 트랙 ‘향기 없는 꽃’(이창수 곡)부터 창백한 죽음의 기운은 감지된다. 색소폰 소리는 진혼곡처럼 들리고, 그의 보컬은 어느 때보다 비장하기만 하다. 그리고 그 유명한 ‘넋두리’(김현식 곡)가 시작되는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은 움직임을 멈춘다. ‘진지하게 몰입하는 태도’가 흔히 조롱과 냉소의 대상이 되곤 하는 이 시대에, 이런 노래를 만들고 듣는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어떤 의문을 남긴 채 그는 떠났다.

가수는 멀리 갔지만, 사후에 나왔던 모든 게 다 아름답지는 않았다. 사족 같은 사후(死後)의 상업주의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던 탓이다. 1991년 초를 환하게 밝힌 6집은 가공할 만한 히트곡을 토해 내긴 했지만, 음반 자체로서는 결함이 없지 않은 작품이었다.  그 후 쏟아져 나온 앨범들에 대해서도 후한 평가를 내리기 힘들긴 마찬가지.  ‘노스탤지어 마케팅’이라는 혐의를 지우기 어려울 것이니 말이다.

허나 나는 그것들이 가객 김현식의 발자취를 다 덮어버릴 만큼 찐득한 무엇이었다 보진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위대한 보컬리스트 사후에 흔히 나오곤 했던 ‘필연적인 부산물’이었을 수도 있다. 정작, 이곳에 없는 그는 그런 것 따윈 신경쓰지 않았을 터이므로.

그러므로 이 글은 주인에게로 돌아간다. 김현식. 다시 플레이해본 그의 노래들은 25년 뒤에도 굳건히 살아 숨쉰다. 여전히 바보같이 ‘노래의 힘’을 믿게 해주는 그의 노래들이 있기에, 나는 그의 이름을 한번 더 추억해볼 수 있었다. 어느덧 시월의 마지막 밤이 멀지 않았다.

 

About 이경준 (145 Articles)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글을 썼고, 하나둘씩 망해가는 잡지(웹진)들을 볼 때마다 역시 '이런 건 하면 안된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 또 이렇게 판을 키웠다. 왜 그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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