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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진을 들으며 반성에 대해 생각하다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었네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었네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었네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었네

사일만에 집에 돌아온 여자
끝내 이유를 묻지 못한 남자의 사연들을
사실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먹어 기억이 안납니다

돼지 기름이 흰 소매에 튀고
젓가락 한 벌이 낙하를 할 때
니가 부끄럽게 고백한 말들
내가 사려깊게 대답한 말들이
사실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먹어 기억이 안납니다
사실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먹어 기억이 안납니다

막창 2인분에 맥주13병
고기 냄새가 우릴 감싸고
형광들은 우릴 밝게 비추고
기름에 얼룩진 시간은 네시간 반

비틀대고 부축을 하고 손을 잡고 키스를 하고
약속하고 다짐을 하고 끌어안고 섹스를 하고
오해하고 화해를 하고 이해하고 인정을 하고
헛갈리고 명쾌해지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그 시간을 또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었네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었네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었네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었네

골목길을 빠져나올 때에
너무나도 달콤했었던
너의 작은 속삭임과 몸짓
운명처럼 만났던 얼굴이

사실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먹어 기억이 안납니다
사실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먹어 기억이 안납니다
사실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먹어 기억이 안납니다
사실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먹어 기억이 안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정말

백현진 – ‘학수고대했던 날’

 

 

‘반성’이란 그 주체가 인간이기에 가능했을, 몇 되지 않는 이성의 능력 중 하나다. 교양 과목으로 배우는 서양철학사만 훑어봐도 파악할 수 있다. 데카르트 이후, 얼마나 많은 학자들이 이 고전적인 테마에 천착해왔던가. 인류는 늘 실수를 저질러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악행과 오류를 기억해냈고, 바로잡으려 노력해왔으며, 같은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달음질해왔던 것이다. 그것이 항상 자신의 삶을 개선하려 노력해왔던 인간이란 동물의 역사다.

‘반성한다는 것’은, 적어도 ‘독립적인 사고가 담보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사회는 개인의 유년기를 무기한 연장해 버렸다. 각종 자격증과 학원, 그리고 취업 스터디가 성찰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으며, 사람들은 점점 자신의 삶으로부터 멀어져 ‘타자와 공동체가 요구하는 어느 좌표’에 자신을 위치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삶에 대한 사유는 사라졌다. 이제 그것을 대신한 것은 타인에 의해 분절된 제도화되고 표준화된 지리멸렬한 개인사였다. 음악평론가 박은석(지금은 제주도에 계시는군요)의 말을 빌리면, “마치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쿨함의 조건”이라도 된 양, 사람들은 SNS를 통해 족히 5분 뒤에는 증발해 없어져 버릴 취향과 취미에 대한 한담들을 포격해댔다. 징후는 명확한 것이었다. “나 여기 있어. 난 이런 것들을 좋아해. 그러니 내 말 좀 들어 줘.” 이것은 남에게 기대지 않고는 숨쉴 수 없는 2000년대 현대인의 존재론이다.

자신의 20대를 회고하며 썼다는 ‘학수고대했던 날’에서 백현진은 정확히 이와는 대립되는 전략을 취한다. 곱창기름에 얼룩진 채 필름이 끊기고 섹스를 하고 다시 미안하다고 주절대는 이 지질하고 어쩌면 한심하기조차 한 이 텍스트의 수신인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들려줄 수도 없고, 들려주기조차 창피해 보이는 이 네 시간 반의 유희들. 어떤 어휘로도 윤색될 수 없을 과거의 흔적들을 백현진은 자신 앞에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그것은 마치 카메라의 시선처럼 냉철하게 녹화된 홍대 앞을 거닐었던 어느 젊음의 우행록(愚行錄)일 것이다. ‘반성의 시간(Time of Reflection)’이라는 표제 아래 일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뒤엉키는 덩어리들. 실타래는 쉽게 풀리지 않고, 비약에서 비약으로 건너뛰는 서사들은 지속적으로 감정이입을 방해하며, ‘미안합니다’고 세 번이나 술 취해 되뇌는 저 마지막의 악랄함은 마침내 아티스트와 청자 사이에 균열을 형성하고, 우리는 흠칫 놀라게 된다.

노래의 교훈은 결국, ‘반성은 언제나 사후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저지르는 짓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 설령 온전히 알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을 동시에 교정하며 행위할 수는 없다. 비극은 그렇게 탄생한다. 하지만 이 비극과의 대면을 억지로 유예하지 않고, “더 나은 삶이 있다”며 꼬드기는 후견인들로부터 결별할 때, 그래서 이 빌어먹을 놈의 일상과 마주할 때, 삶이란 놈은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고 노래는 말하는 것만 같다. 설령 술 취해 세 번이나 혀가 꼬이더라도. 결국 자신에게 그 반성은 진심이므로.

윤고은의 단편 ‘1인용 식탁’에서 잘 그려졌듯, 2000년대의 한국은 ‘사회적 승인’이 무엇보다 중요한 나라다. 어눌한 말주변을 지적받은 예비 취업자는 스피치 학원을 수강하고 ‘수료증’을 받으며, 요리 경연대회에 출전한 어느 출연자는 전문가의 냉혹한 일갈에 눈물짓는다. 무심코 들여다본 타임라인에는 지역별 맛집과 그에 대한 찬사가 넘쳐흐른다. 그곳을 다녀온 트렌드세터의 사진에는 승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가 함께 한다. 그에 따르는 RT와 RT의 연쇄들. 마치 지네를 보는 듯 늘어선 그 이면에는 사실 아무것도 없으며, 우리는 그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의존하고 싶었던 거라고. 용기 내어 말하는 이는 보이지 않는다. 팔로워의 숫자가 자신을 대리하는 명함이 되어버린, 홀로서기를 견디지 못하는 이 ‘거짓 함께’의 사회 위로 음반의 제목이 술 취한듯 떠다닌다.

그런데… 그뿐이 아니다. 오늘은 4월 15일. 파국의 그 순간으로부터 1년이 흘러갔지만 정작 반성해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다. “반성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진심”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것일까. 만약 전자의 경우라면 교육을 다시 받아야 할 것이고, 후자의 경우라면 임상시설로 가야 할 것이다. 둘 모두 답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

* ‘고대대학원신문’에 연재했던 한 칼럼을 수정하고 보완해 실었습니다.

About 이경준 (145 Articles)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글을 썼고, 하나둘씩 망해가는 잡지(웹진)들을 볼 때마다 역시 '이런 건 하면 안된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 또 이렇게 판을 키웠다. 왜 그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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