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Articles

블랙 메디신: Irreversible

이 정도면 사건이라 불릴 만하다

블랙 메디신은 한국에 데스메탈을 처음으로 가져온 밴드 스컨드럴/사두의 기타리스트 이명희와 데스메탈 밴드 시드에서 활약한 보컬리스트 김창유가 두 축을 이룬 한국에서 보기 드문 둠/슬러지/스토너메탈 계열 밴드다. 생소할지도 모를 이 흐름은 1970년대 저 명망 높은 Black Sabbath로부터 발원했고, 서던락/얼터너티브락/펑크/포스트락 등 다채로운 서브장르들과 교배되며 그 외연과 알맹이가 커진 헤비니스의 ‘서브장르’ 되겠다(장르의 기반을 다지는 데 Trouble과 Melvins가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은 꼭 기억해 줄 필요가 있다). 재미있는 건 한국에서의 철저한 무관심과는 다르게 이 흐름이 해외에선 어느덧 ‘피치포크’를 비롯한 해외 웹진들이 주목해서 관찰하고 다뤄주고 있는 ‘헤비니스’로 우뚝 자리했다는 점이다. 힙(hip)한 블랙메탈을 연주(혹은 유사-블랙메탈을 연주하는)하는 몇몇 팀을 제외한다면, 아마 이 둠/슬러지/스토너는 당신이 ‘연말결산’류의 기사에서 가장 많이 리뷰를 읽게 될 헤비니스 장르가 될 것이다.

뭐, 이런 건 어디까지나 배경일 뿐이다(허나 꽤 중요한 배경일 순 있다). 그러니 다시 이 음반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사실 특징은 의외로 복잡하지는 않다. 축축 늘어지는 템포, 투박하지만 묵직하고 중독성 넘치는 기타 리프, 폭발할 듯 폭발할 듯 리스너의 기대치를 높여 나가지만 끝끝내 그 기대를 충족시키지는 않는 설계, 그 아래로 지나가는 끈적끈적한 블루스의 자취. 최근 들어 이 장르 내부에서도 다양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에, 섣부르게 일반화하는 것은 위험하긴 하나, 대개 이 정도의 바운더리 내에서 움직이는 음악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다. 저마다 음악 스타일이 다르긴 하지만 Electric Wizard, Bongzilla, Neurosis, Cult of Luna, Baroness, Red Fang, Wo Fat… 이런 밴드들을 함께 알아둔다면, 이 블랙 메디신의 음악을 더 감칠맛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결성 10년 만에 나온 음반답게, [Irreversible]은 시간의 켜가 묻어나는 단단한 음악들로 채워져 있다. 첫 곡 ‘The Arson Boy’부터 감지되는 바다. 서서히 레이어(layer)를 쌓아나가면서 귀를 잠식해나가는 이명희의 기타가 너울지면, 김창유의 보컬이 비틀비틀 그 위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아나가는데 솜씨가 장난이 아니다. 수사적으로 “잘한다/좋다”가 아니라, 언급한 밴드들만큼 사운드의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두 번째 트랙 ‘Sludge Song’으로 이어지면, 매력은 한층 극대화된다. ‘뻘’에서 뒹구는 것처럼 느릿하게 진행되다 갑작스럽게 기어변속을 통해 스피드를 조절하는 노련함, 탁하고 거칠게 주술처럼 가사를 던져대는 보컬. 하드락과 서던락, 헤비니스가 기묘하게 서로의 꼬리를 붙들고 늘어지며 ‘난장 사운드’의 본편을 구성한다.

그러나 아직 하이라이트는 나오지 않았다. Down이 본인들의 음반에서 보여준 것만큼이나 기막힌 헤비 그루브를 들려주는 ‘Your Devilish Smile’, 작정하고 에픽(epic)을 써나가겠다고 결심한 ‘늪의 길(Road Swamp)’이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Crowbar의 쫄깃함과 Clutch의 드라이브감이 어느 상공에서 만나서 지상으로 뚝 떨어진 듯한 ‘Misdirected Rage’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런 질감, 그리고 감성이 국내 밴드의 손에서 주조되었다는 것이 그저 놀랍기만 할 뿐이다. 클리셰처럼 삽입된 인트로에 순간 멈칫하다가도 이내 둔중하게 베이스 라인으로 아우라를 피워 올리며 ‘스릴감’을 조성하는 파이널 트랙 ‘Riots Rage’는 또 어떤가.

어디선가 썼지만, 모든 ‘상상 이상의 것’들은 장르의 장벽을 허물고, 편견을 깨부순다. Kendrick Lamar의 2015년작 [To Pimp a Butterfly]가 그랬듯, 나는 이 음반 [Irreversible] 역시 그럴 것으로 확신한다. 요약하자면 이런 거다. 레퍼런스를 이용해서 레퍼런스를 넘어서는 결과물을 창조해냈다는 점. 자칫 비슷하게 흘러갈 수 있는 앨범의 무드에 지속적인 변화와 변이를 가했다는 점. 그게 어색하지 않다는 점. 둠/슬러지/스토너의 ‘전형’이자 ‘전범’에 초근접한 완성형의 사운드를 만들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곡이 좋다는 점. 이런 점들을 종합했을 때, 나는 현재까지 이 앨범이 ‘2015 국내 올해의 음반’이라고 과감하게 이야기해본다. 전혀 과장이나 거짓이 아니다. 음반을 들어본다면,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장르의 컨벤션을 이해하게 된다면 이 말의 의미를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4.5 / 5)

 

About 이경준 (145 Articles)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글을 썼고, 하나둘씩 망해가는 잡지(웹진)들을 볼 때마다 역시 '이런 건 하면 안된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 또 이렇게 판을 키웠다. 왜 그랬니?

댓글 남기기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