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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평론가로 생존하는 방법

음반을 향한 욕망의 바벨탑. 나는 6000장이 넘고는 세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어디가서 많다고 얘기 안 하고 다닌다. 더 정신나간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음반을 향한 욕망의 바벨탑. 나는 6000장이 넘고는 세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어디가서 많다고 얘기 안 하고 다닌다. 더 정신나간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음악을 듣기 시작했을까. 그건 아마도 중학교 2학년 때, Helloween과 Scorpions의 테이프를 구입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당시 난 어머니 두통의 진앙이었다. 욕망의 법칙을 따라 바벨탑처럼 쌓여만 가는 테이프와 CD. 그와 더불어 당신의 한숨소리도 함께 데시벨을 높였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음반이 너무너무 갖고 싶은데. 내가 잘 써먹었던 방법은 굉장히 고전적인 것이었다. 문제집 가격을 부풀렸고 저녁을 굶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중고등학교 근처에는 ‘상’으로 시작하는 작지만 알찬 레코드샵이 있었는데, 그 집은 1990년대 초중반에 Manic Street Preachers를 수입반 CD로 팔고 있었다. 말하자면 발빠른 수입상인 셈이었지. 당장 돈이 없던 나는, 강수지의 음반 뒤에 CD를 숨기는 것으로 타인의 구매를 강제저지시켰다. 하지만 피에 굶주린 욕망을 달래기엔 역부족. 회사에 들어가서는 월급을 통째로 앨범과 바꿔치기 했고, 국내에서 구하기 힘들다는 소위 희귀반들은 고수들의 소유물을 빌려 굽거나 심야방송 라디오를 졸음을 참아가며 녹음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과거를 미화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말이다.

Manics의 저 전설적인 데뷔반

Manics의 저 전설적인 데뷔반

그렇게 음반을 모으고 기회가 되는대로 글을 쓰다 보니 어느덧 나는 음악평론가가 되어 있었다, 라고 자신있게 말하면 좋겠다. 그러나 그런 물거품 같은 어구를 동원할 이유가 있는가. 매체에 기고할 때는 ‘평론가’라는 타이틀이 따라붙지만, 사실 당사자인 나도 내 직업이 뭔지 잘 모른다. 사전을 펼쳐보니 직업이란 ‘일에 종사하고, 그에 따른 경제적 급부를 받는 것’이라고 나온다. 남들처럼 내게도 그 정의를 신탁처럼 받들어온 친구들이 있다. 그들과의 만남은 아직도 어색하다. 피할 수 없는 대화를 섞어야 하기 때문이다. 3년 전 이태원의 모 술집.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대충 이런 대화가 오고갔던 것 같다. 너 아직도 그러고 사니? 생활은 되냐? 그때 이렇게 답했던 것 같다. 그러게. 그러니까. 그렇지 뭐.

한국에서 음악평론을 쓰려거든 친구들의 힐난을 꾹 씹어 삼킬 용기를 가져야 한다. 욱 하면 안 된다. 졸지에 생활부적격자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덤으로 한 시간 가량의 인생충고도 듣게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친구들과의 관계를 끝내겠는가? 그럴 땐, 참을 인(忍)자를 넉넉하게 다섯 개 정도 마음 깊숙한 곳에 새겨두고 있으면 된다. 말하는 것보다 듣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버티기가 한결 쉽다. 어른들 말씀처럼 처음이 힘들지, 몇 번 견디다 보면 열심히 듣는 척 눈빛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며(이게 중요한 스킬이다) 머릿속으로는 Pink Floyd를 플레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평론가로 생존하기 위해서 이 정도 극기로는 아직 부족하다. 인격도야의 과정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지인들과의 대면은 그나마 쉽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내가 하는 일을 설명해야 할 상황을 맞게 되면 고역도 이런 고역이 없다. 영화평론을 하신다구요? 아뇨, 음악평론입니다. 아, 음악도 평론이란 걸 써요? 그러게요. 대체로 상황은 원하지 않게 이렇게 흘러간다. 영화든 만화든 축구든 평론식구들에 대한 말 못할 연대의식을 느끼는 나이지만 이때만큼은 순간적으로 발끈한다. 상대방의 시선은 이해불가 반, 동정심 반으로 교차한다. 아, 나도 내 업을 잘 설명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매번 그에 실패했던 나는 할 수 없이 음악평론은 부업이에요, 라고 부연할 수밖에 없다. 이제야 그들은 이해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숨기지 못할 한줄기 씁쓸함. 그리고 외로움. 레전드 평론가 레스터 뱅스의 삶도 그러했으리라. 그는 1982년 서른세 살의 나이로 자택에서 요절했다. 사인은 약물과다복용. 죽었을 때 그의 전축에선 Human League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로맨틱한 것 같지만 곰곰 뜯어보면 ‘세계의 비참 시리즈’에 나올 만한 죽음이다. 그러니 이런 말 좀 덧붙이지 말란 말이다. “죽을 때도 그의 곁엔 음악이 함께 했다. 그의 신부는 음반이었다”. 이게 뭔 개소린가. 우리도 여자사람을 좋아한단 말이다.

레스터 뱅스의 시신을 지킨 그 음반이다

레스터 뱅스의 시신을 지킨 그 음반이다

그러나 평론가를 꿈꾸는 그대, 이딴 외로움쯤이야 미학으로 승화시킬 일이다. 당신은 학창시절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존재였으니, 그 기간이 좀 연장된들 어떠랴. 관료조직 내부에서 가식적인 변검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 이렇게 위안을 삼으면 기분이 2그램 정도 좋아진다. 그럼 수양하는 김에 한 가지 덧붙여볼까. 자신의 견해와 맞지 않는 원고를 청탁받을 때는 최대한 매체나 음반사의 성격에 맞추는 게 중요하다. 얼마 되지 않는 원고료로 살아가는 평론가에게 이 정도 자기기만은 필수다. 인격을 걸고 도저히 좋게 써줄 수 없는 앨범은 어떤가? 방법이 있다. 최대한 중립적이고 애매모호한 언어를 구사해 직접적인 비판을 삼가는 것이다. ‘앞날이 더 기대되는 신인’이라는 식의 클리셰를 쓰는 것을 추천한다. 거장의 똥반을 대했을 때는 어떤가? 친구, 고집은 부리지 않는 게 좋다. 당신을 살만 루시디로 간주하는 빠순 빠돌의 협박메일이 기다리고 있다. 그뿐인가. 자신을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 팬클럽과의 배틀은 어떤가? “너 뜨고 싶어서 발악하는구나? 잠이나 쳐 자는게 어때?” 그러니까.

그래도 이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지 몰라 첨언해본다. 절대로 ‘명함과 기표’라는 것에 목숨을 걸어서는 안 된다. 학원강사, 자영업자와 더불어 평론가 역시 사양직종이기 때문이다(아니 언제 직종이긴 했나?) 가뜩이나 필드로 들어오기 위한 채널도 좁아졌다. 예전에는 인문학 강좌 비슷하게 음악칼럼니스트 강좌라는 것이 있었다. 물론 그 과정을 이수한다고 해서 모두가 평론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경영학과 나왔다고 CEO가 되는 건 아닌 것처럼. 그런데 요즘은 없어졌다. 사실 가르칠 만한 사람도 많지 않다. 더 중요한 건 세태가 바뀌었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현재 30명 중 28명의 장래희망은 공무원이다(요즘같은 현실에선 지극히 당연한 거지).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음악평론가는 이미 존재감이 없는,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가능성이 농후할 직업이란 얘기다. 더 날카로운 지적에 따르면 평론가란 ‘존재자 없는 존재’, 그러니까 ‘유령’과 비슷한 무엇이다. 없는 듯 있는데 없는 쪽에 더 가까운 존재. 그러니 음악평론가란 그냥 푸닥거리나 굿을 통해 없애버려야 할 존재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음악평론가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는 물음은 이제 존재론적 물음이 된다. 몇몇 사람들은 왜 유령의 존재방식을 택해야 했을까. 당연히 그게 좋아서 그랬을 테지. 맞다. 그들이라고 돈이 싫겠는가. 그래도 솔직히 먹고 살 정도만 벌면 된다. 집 평수를 넓히는 데도, 차를 구입하는 데도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스토아주의를 실천하며 살고 싶진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진짜 직업’을 그만둔다면? 당연히 대책은 없다. 원고료 현실화는 음악평론가의 모진 생존을 도와줄 필요충분조건이다. 아직도 원고지당 3000원이라는 가공할 만한 조건을 제시하는 매체들이 보인다(이봐 최저시급은 5580원이라구). 여기가 무슨 소련의 집단농장쯤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비즈니스적 마인드로 중무장하는 것도 꼴보기 싫지만, 이건 인간적으로 너무하지 않나. 기본빵은 먹어야 뭐라도 나올 것 아니겠는가. 찰스 부코우스키 형님의 말을 빌려보자.

찰스 부코우스키 형님의 통렬한 말이다

찰스 부코우스키 형님의 통렬한 말이다

굶주림은 예술을 돕지 않았다. 인간의 영혼은 위장에 뿌리 내리고 있다.
-찰스 부코우스키

평론가에게도 위장은 있다.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음악평론가 이XX는 폐간된 모 잡지에서 밀린 고료가 꽤 있다. 그가 그것을 정산 받는다면 지금보다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수로 받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눈치가 없다. 편집장이 함께 하자고 했을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다. 어른들 말이 맞다. “달콤한 선배의 말은 사기일 확률이 높아!” 3년 전 폐렴으로 입원했을 때, 지금도 아들이 공무원을 하길 바라는 사랑하는 내 아버지께서는 병원을 찾아와 이렇게 말씀하셨다. “니가 시인이냐? 이 새꺄. 니가 시인이냐고 이놈아.” 너무 맞는 말이었는지 나는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멍청하고, 둔감하며, 자신이 하는 일을 ‘대업’인양 포장하고, 욕 먹는 걸 ‘잔다르크의 수난’쯤으로 착각하는 어린 양들이여. 그들의 생존은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 지금은 사라진 잡지 ‘브뤼트’에 기고했던 한 칼럼을 수정, 추가, 보완했습니다.

About 이경준 (145 Articles)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글을 썼고, 하나둘씩 망해가는 잡지(웹진)들을 볼 때마다 역시 '이런 건 하면 안된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 또 이렇게 판을 키웠다. 왜 그랬니?

1 Comment on 음악평론가로 생존하는 방법

  1. 음악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아 다양한 평론사이트를 들르곤 합니다.
    친구들은 흔히 평론가들을 꼰대 정도로 생각하더군요.
    씁쓸합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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