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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열: 여전히 노래의 묵직한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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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냉소는 결국 자신에 대한 혐오나 불만을 외부로 투사한 것이다. [V]를 공개할 당시, 그에겐 분명 냉소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것이 예술가적 기질인지, 뮤지션에게 간혹 찾아온다는 질환인지, 아니면 갑작스런 센티멘탈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땐 그에 대해 자세히 묻진 않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5집 [SYX]를 보고 있다. 그는 이제 ‘냉소가’의 전형이라기보다는 ‘투사’나 ‘위대한 긍정주의자’의 스탠스로 돌아왔다. 그것이 이 음반에 잘 반영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이것이 언제 다시 바뀔지 모르는 ‘일시적인 변덕’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현재/이 음반에 주목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 인터뷰가 진행된 이유다.

 

선형적이고 순차적인 디스코그래피의 나열을 싫어해서 전작 4집의 타이틀을 [V]로 갔다. 이번 음반 타이틀의 음가는 식스. 이러다가 이것도 강박이 되어버리는 거 아닌가?

이: 3집 [Why We Fail]은 타이틀을 노래 제목으로 지었었고, 저번 음반은 4집인데 [V]로 갔었다. 경준 씨 말처럼 이런 장난을 또 하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두 번이면 족하지 않을까 한다.

 

음원이 들어있던 폴더의 이름이라고 들었다.

이: 과정은 간단하다. 음반 제목을 끝까지 확정하지 않고 하고 미루는 거다. 얼핏 [X]라고 할까도 했었다. 그런데, 그건 예전 메탈 밴드 음반 제목 같기도 해서(웃음). 그러다 [SYX]가 낙찰된 것은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V]때도 그랬는데, 나조차 모르는 것을 ‘표기’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걸 도무지 문장으로 축약할 수 없게 된 거였고, 그래서 이렇게 한 거다. 노래 제목도 데모 상태 그대로 갔고, 가사도 거의 수정 없이 갔다. 그런데 그게 음반의 생리가 아닐까? 부품들을 모아서 조립한 상품에 ‘이름’을 짓는 건 참 덧없을 때가 많다. 핸드폰도 그렇지 않나? ‘갤럭X’, ‘아X폰’ 등등, 그게 꼭 필연적으로 붙었어야 하는 이름은 아닐 것이다. 좀 편하게 가고 싶었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음가’가 ‘식스’라는 거지. 아, 그거 아나? [V]의 음원이 들어 있던 폴더의 이름은 [SYV]였다.

 

뮤지션들에게 음원에 적확하게 어울리는 타이틀을 잡는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아마 고역일 거다.

이: 이건 어느 뮤지션의 경우다. 음반을 내기 직전 타이틀/음반 재킷 등을 두고 고민하던 뮤지션이 재킷은 결정했는데 딱 맞는 제목이 떠오르질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친한 뮤지션에게 축전을 보낸 게 있었는데, 그에 대해 “Thank You, Old Sock”이라고 왔던 답신이 기억이 났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음반의 제목은 [Old Sock]이 된 걸로. 가끔 그런 식으로도 된다.

 

컴팩트해졌고, 가벼워졌다. 본인의 설명처럼 좋은 싱글 모음집의 성격을 갖는 것 같다. 스튜디오 라이브를 중심으로 구성된 전작이 주술적인 아우라에 휘감겨 있었다면 이번 음반은 그렇진 않은 것 같다. 부담을 지운 듯한 느낌이다.

이: 나보다 어린 음악 하는 친구들에게 “음반을 구상함에 있어서 10곡이 동시에 나올 수는 없으니 1~2곡의 핵심 곡에 포커스를 맞춰라”는 말을 해줄 때가 있다. 그런 생각을 3집 때부터 했던 것 같다. 그 1~2곡에서 탄력을 받아서 집을 짓는다는 느낌? 그건 [V]할 때도 그랬다. 그런데 [V] 이후엔, 흔히 말하는 ‘개연성/통일성’에 대한 부담은 놓았다. 오만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음반에 내재된 성분들이 충분히 리스너들에게 그 풀이를 해 줄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통일성/개연성 그런 거 감안하지 말고 그냥 집중해서 곡을 써 나가자. 대신 누락할 곡이 있다면 가차 없이 누락하자. 데모 단계에서 미완성된 곡도 있었고, 5~6년 동안 묵혀둔 곡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A Letter From’을 비롯해서 3~4곡의 주요곡은 있었던 것 같다. [V] 음반 할 때는 “이젠 내 멋대로 할 거다”라는 의식이 지배했다면-그건 아무런 자신감이나 의식이 아닐 수도 있지만 말이다-이번에 중요했던 건 “집에서 나온 이 결과물들을 어떻게 믹스로 보완할 것인가”였다. 조언을 듣고 리서치를 하고, 장비를 구입하고. 그에 대한 고민이 더 많았던 것 같다.

 

혹시 [V]한대음노미네이트만 되고, 수상하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이 반영된 건지.

이: 쓰린 게 남아 있다고 보는 건가? 남들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상을 받든/그렇지 않든 그 두 위치에 다 가는 게 싫다. 어떤 자아는 “음반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이야”라고 말하지만, 또 다른 자아는 “이런 게 상을 받으면 안 돼”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게 말한 게 처음인데, “노미네이트되었다, 오실 거냐?”라는 선정위원회의 제안에 “이번엔 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시점에는 음악을 하면서 얻었던 평이나 상이나 그런 게 다 의미 없다고 느꼈던 것 같다.

 

[V]에서 단보우 등 오리엔탈한 악기 편성이나 프로그레시브한 외피로 실험성을 강조했다면 이번 음반은 어느 의미에선 전형적인 어덜트 컨템포러리/신스팝/드림팝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청자에게 잘 들리는 음악을 해보겠다는 의중의 표명인 것인지?

이: 일단 곡 길이가 짧아진 건 은연중에 그런 걸 의도한 바가 있었다는 거겠지. 편곡이나 확장에 대한 욕심을 인위적으로 차단하거나 한 건 아니지만, 나중에 보니 그렇게 되어 있더라. 또 워낙 [V] 앨범의 보컬 멜로디가 안 들리지 않았나. 그걸 내놓고 보니, 어떻게든 그건 기술적으로 보완을 했어야 하는 지점이라고 느꼈다. 그런 걸 감안한다면 마땅히 ‘잘 들리는 것’에 대해선 신경 쓴 바가 있다고 봐야겠지. 장르라? 장르는 딱히 의식하고 한 건 아닌데, 드러머 없이 집에서 홀로 일하다 보니 음반의 성격이 ‘유기적’이지는 않게 된 것 같긴 하다. 거꾸로 말하면 그게 장점이 될 수도 있는 거지만.

 

이 음반으로 본격적인 홈 프로젝트’(원맨밴드 레코딩)의 서막을 알렸다. 그 장점은 뭔가?

이: 언젠가는 이렇게 해봐야지 싶었다. 간간이 집에서 녹음된 보컬/기타 파트를 사용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100% 집에서 나온 산물이 스튜디오를 통과하지 않은 채 음반으로 옮겨진 적은 없었다. 장점이라면 철저하게 자아중심적인 건데 “내가 그걸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나 더 말하자면, 남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되는 것. 음원이 스튜디오에 도착하면 아무래도 타인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게 있지 않나. 내가 오랫동안 작업해온 동료들을 무시한다는 건 아니지만, 이번엔 그런 도움을 버리고 “혼자 앉아서 구상해왔던 그림을 그려 보자. 데모를 묻어버리지 말고 살려 보자. 그게 좋든 나쁘든 이번엔 그대로 내 보자”, 그랬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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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론으로 들어가 보자. 첫 곡 ‘Asunder’산산이/뿔뿔이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다. 고상하고/쓸쓸하며/홀로 남겨진 것 같은 클럽튠이다. 마치 자신을 가리키는 것처럼 말이다.

이: ‘클럽튠’이라고 해서 하는 말인데, “나는 왜 댄스 그루브가 안 나오나”에 대해 고심했었다. 스스로 그런 곡을 쓰는 걸 제한했던 것 같기도 하고, “진짜 내 안엔 이런 게 없나?”라고 자문하기도 할 정도로. 유앤미블루 할 땐 나름 그루브를 잘 썼던 것 같았는데 말이지. 그런데, 그런 것들이 어느 순간 소독이 된 것처럼 사라져 버린 거다(웃음). 그걸 되찾고자 하는 열망은 없지만, “댄서블한 곡을 해보고 싶다”는 의지를 가지고 쓴 곡은 맞다. 흑인음악적인 그루브가 들어간 곡은 아니지만 말이다.

 

//한 댄스곡이다.

이: 하하하. 이걸 춤을 추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음향과 분노(The Sound and The Fury)’를 연상시키는 ‘sound and fury’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소설도 소설이지만 이런 단어들이 또 댄서블한 튠에 쓰이니 그 역시 기묘하다 할 만하다.

이: “이걸 있어보이게 써야 하나”, 이런 건 아니었다. 마침 EBS ‘영미문학관’ 원고를 읽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앞의 원고에 ‘강렬하게(intensive)’ 빠져든 때가 있었다. 그래서 인용을 한 거다.

 

‘A Letter From’의 모티프는 보도자료에 쓰였듯, 우리가 처참히 무너졌던 ‘4월의 그 사건이다. 일부러 감정이입을 최대한 배제하고 쓴 것 같다. 마지막에 포말처럼 흩어지는 사운드가 인상적이다. 무언가가 침몰하는 듯한 느낌도 나고.

이: 명백하게 나타난 건 아닌데, 읽다보면 “이거 그 이야기 아냐?” 정도라곤 예측할 수 있을 것 같다. 술 엄청 먹었다. 이게 그럴 때가 있다. 단시간에 폭음을 하고, 빨리 쓰고 한번 정도 고쳐야 좋은 곡이 나오는 경험. 처음엔 영어 가사였는데, 앨범의 모든 곡을 영어가사로 가는 건 용납이 안 될 것 같아서 한글로 고친 곡이다. 인터뷰어가 언급했듯 강하게 다가오는 건 ‘물의 이미지’다. 심연 같은.

 

분위기가 바뀌어, ‘Amore Italiano’는 모던하고 어반한 느낌을 준다.

이: 이건 데모 제목 그대로 간 거다. 훗날 어쨌든 내가 찾아서 써야 하니까 그런 뚱딴지같은 제목을 붙여서 ‘세이브’를 해 두었던 곡이다. 형태는 달랐지만, 2집 즈음에 쓰인 곡인데, 개인적으론 ‘유로피안 뽕’이 아닐까 한다. ‘구리구리한 느낌’의 제목을 고스란히 음반으로 들고 온 것도 그 때문이다.

 

‘Ave’는 음반에 실린 곡 중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곡이다. 그리고 가사가 잘 들리질 않는다. 막 던져댄다는 느낌.

이: 이건 소리 나는 대로 단어를 끼워 맞춰 본 거다. 이게 재미있는 실험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가사를 천천히 훑어가면 ‘피식’ 웃음이 나올 수 있다. Procol Harum의 ‘A Whiter Shade of Pale’의 가사도 이런 식인데, 그 노랫말도 아무 의미 없지 않나. 이 노래도 다르지 않다. 그러다 불현듯 중간에 ‘ave maria’가 튀어나오는데, 그로 인해 나오는 진한 아우라는 있다.

 

‘Come Back’은 본인이 꼭 해보고 싶다고 밝혔던 블루스락이다. 정확히는 블루스락으로 시작해 구조를 바꾼다. 가사도 미스매치를 이루는데, “mother fucking crazy!”라는 서양 욕설과 동양 장단이 접합되어 있다. 가장 재밌게 들은 곡 중 하나다. 진지한 맛도 나면서 비틀린 유머도 있다. 작정하고 쓴 곡이군.

이: ‘A Letter From’과 이 곡이 [V] 이후 최초로 나온 곡들이다. 그런데 그 영향권에서 다 벗어나지는 못했는지 ‘A Letter From’의 기타리프도 그렇고, 이 노래의 동양적인 냄새도 그렇고 약간은 [V]의 잔재 같기도 하다. 회사에서는 다른 분과 콜라보를 하란 말도 있었는데, 정중히 고사했던 곡이다. 이제는 그런 형식이 내적으로 조금 힘들다. 같이 했던 그분들 탓이라는 말은 아니고.

 

‘Feel Your Body Move’3집까지의 이승열을 좋아했던 사람들을 다시 모을 수 있을 법한 향취가 실린 곡인 것 같다. 달콤한 팔세토와 함께 심플하고 직관적으로 오니까.

이: 음반을 집에서 작업해야겠다고 결정하게 해준 곡이다. 이 곡은 심진보 엔지니어가 믹스를 담당했는데, “집에서 녹음한 사운드로 버무린 이 질감이 좋으니 이대로 밀고가고 싶다”고 하더라. 하지만 집에서 녹음하는 덴 확실한 단점이 있다는 판단에, 결국 노래는 녹음실에서 재녹음 되었는데 지금 보면 이 노래야말로 더 ‘댄서블’할 수 있었던 곡이다. 만일 내가 요리사라면 굉장히 심심한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일 것이다. 사실 ‘싱글’로서 다가가고 싶다는 기대도 했다. 그런데 기대를 많이 했는지, 많이 들어서 그런지 그게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글 쓰다가도 왜 그럴 때가 있지 않나? 취중에 쓴 글귀인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반짝하는 것. 곡들 중에서도 간혹 그런 곡들이 있다. 3집의 ‘D. 머신’과 이 노래가 그렇다. ‘D. 머신’은 오버프로듀스되는 바람에 최종적으론 증발량이 많았고, ‘Feel Your Body Move’는 오버프로듀스는 되지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휘발된 것들이 있다. 내가 여러 번 들어서 그런 걸까? 아무리 순간의 마법이 있더라도 그게 앨범화되면 힘이 오래가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 마술/마법이라는 건 그 찰나에만 아티스트에게만 강림하는 것이다. 본인만 안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대중과 소통한다는 건 다른 문제인 것 같다. 저번 인터뷰에서 취향이란 맛보면서 발전되는 것(acquired taste)”라는 말을 했었다. 그걸 신뢰한다면 여기 실린 곡들에 은닉해 있을 어떤 마법(비록 상당량 휘발되었을지라도)’이 어느 날 빛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맞다. 내가 본 원형과 그게 같을지는 모르지만. 리스너들이 이 음반을 듣다 보면 “나는 이런 요소 때문에 자꾸 이 앨범을 듣게 돼”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미 내겐 소멸된 마법이지만, 지연되어 어딘가에서 발현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거지. 그건 모르는 거다.

 

‘Love for Sale’은 잡음과 전자음, 목소리가 섞여 구원의 빛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건 사뭇 종교적이기도 하다.

이: 이것도 오래된 곡인데, 믹싱과정에서 추가되거나 변형된 게 있지만 송폼(song form)은 다 완결된 상태로 있던 트랙이다. 그리고 공연장에서 첫 번째로 공개되었던 ‘미발표 싱글’이기도 하다. 이걸 연주할 당시 사람들이 묻지도 않았는데 나는 “이 곡은 매맞는 여자에 대한 곡입니다”라고 하고 다녔다. 매맞는 여자/학대받는 여자/죽임을 당하는 여자/가정폭력의 희생자. 그런 것들이 곡을 쓰기 위한 단초였다. 아마 곡을 듣다보면 지옥을 경험하는 와중, 절규하는 느낌 같은 것도 있을지 모른다. 안 좋은 버릇이지만 그날의 감성에 충실하다 보면 오리지널 멜로디를 훼손하기도 하는데, 이번 음반 내고 한 첫 라이브 때도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왠지 이 곡만 부르면 힘겹다. 실제로 “부르기 힘든 곡이에요”라고 소개하는 곡이기도 하다.

 

‘To Build a Fire’는 결의에 차 있다. 그런데 결의가 너무 끝에 나오는 것 아닌가. 단출한 악기 편성이 오히려 비장함을 고조시킨다.

이: 곡의 공간감은 이 곡이 제일 좋다. 그건 템포가 느려서 그럴 수도 있고, 악기편성이 단출해서 깊이가 더 느껴져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편안하게 가다가 한번 확 꼬는 게 마음에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곡의 제목은 잭 런던의 단편 제목(‘불을 지피다’)에서 따 온 것이기도 한데, 그 소설을 보면 추운 알래스카의 오지에 죽음을 앞둔 사람이 나온다. 그런데 그 사람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우둔하고 어리석다. 왜, 책을 읽을 때 (영화도 그렇지만) ‘부분’이 더 크게 다가올 때가 있지 않나. 나는 그런 사람에 가깝다. 그런 파편들을 읽으면서 내게 이 책의 메시지는 “죽음이 더 구원에 가까이 가는 게 아니냐?”였다. 에스키모 전통 중엔 죽음이 임박한 부모를 아들이 외딴 곳으로 모시고 가는 게 있다고 한다. 거기서 아들/며느리 다 인사하고 떠나고, 홀로 남는 거지. 동사하게 되고. 남는 건 추위와 고독.

 

존엄성(dignity)이 느껴지는 곡이다.

이: 죽음을 존엄성을 가지고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나도 자신은 없다. 울부짖고 소리치고 더 살고 싶다고 그러지 않을까. 내가 비행공포가 있는 이유도 ‘비행기 추락’이야말로 가장 ‘존엄성이 박탈된 죽음’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종종 접하는 장면이지만 시한부 삶을 병상에서 맞이할 때 연기자들이 혼연일체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놀란다. “와, 어떻게 저러지?” 그건 대단한 거다. [V]에선 ‘We Are Dying’이라는 곡을 썼지만, 돌이켜 보면 그런 것도 다 객기가 아니었을지. 죽으면 안 되는 거다. 죽지 말아야 한다.

 

노래1’은 이승열다운 제목이다. ‘결의2’이자 본인의 인생역정/음악역정에 대한 중간결산이라 할 수 있는 곡인 것 같다. “노래에 실려 가네/숱했던 치기여/덧없어 놓아버린/인생의 앙금도라는 가사가 가슴에 맺힌다. 아까 존엄성이야기를 했다. 아직도 노래의 묵직한 힘을 믿는가?

이: 특정한 주제가 있었다. 1집의 ‘푸른 너를 본다’의 주제가 영화였다면, 이 노래의 주제는 드라마였다. 그런 상황을 상상하며 썼다. 그래서 별로 지지고 볶고 하지 않았다. 가사도 하룻밤만 투자해 쓰자. 다음날 일어났을 때 “이게 뭔가” 싶게만 하지 말자. 검열하지 말자. 그런 정신으로 쓴 곡이다. 반복을 덜 해서 그런 건지, 내가 마인드를 완전히 닫지는 않아서 그런 건지, 현재까지는 공연할 때도 즐기면서 부를 수 있다. 자, 질문에 답을 해보자. 나는 그 ‘음악이 가진 힘’이라는 게 있다고 본다. 세상엔 여전히 많은 음악들이 있다. 그중엔 내가 듣지 못한 음악들도 있겠고, 평생 동안 만나지 못할 상업적으로 소비되지 못할 음악들도 있을 것이다. 그 노래들의 힘을 믿는다. 그게 없다면 음악을 하는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저번 음반 끝 곡 ‘Cynic’은 마무리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이번 노래1’을 듣고 있으면 마치 영화가 끝나고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보는 것 같다.

이: 오늘이 목요일인가? 며칠 전 월요일에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녹음하면서 다섯 군데 대학을 지원했다가, 네 군데에서 고배를 마시고 별 관심 없이 안전장치로 해둔 대학에서만 합격통지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어, 그래 다녀보지” 그런데 나는 그런 거만함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게 있다. ‘노래1’도 살짝 그런 느낌이다. 이 곡이 없었다면 다른 곡들을 써야 하는 압박이 틀림없이 생겼을 것이다. 그래서 이 곡이 좋다. 앞의 여덟 곡을 듣고 이 노래를 들을 분들에게 건네는 “미안해요”라는 인사일 수도 있고. 나도 내 음악이 듣기 힘들다는 걸 안다. 그 미안함을 이렇게 표현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저번 인터뷰 중 냉소가(cynic)’가 본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번 음반은 시니컬하다기보다는, 더 오래 음악하고 더 길게 가겠다는 긍정적인 뉘앙스가 읽힌다. 마치 종말의 날, 미지의 괴물과 홀로 대결을 앞둔 투사의 음반 같다. 그간 달라진 게 있는 건가?

이: 사람들이 “이건 대세에는 지장이 없다”라고 말하고 다니는 걸 봤다. 그땐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된 건 30대 중반이 되고서다. 이 바닥에 있다 보면, 장인이든 아티스트든 누구든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함정이라는 게 있지 않나. 어쩌다간 그 안으로 제 발로 들어가기도 하는 함정. 그런데 그 함정을 보고 다니다 보면 음악적 페르소나 외에 인간으로서의 캐릭터 또한 변질되기도 한다. 그게 문제다. 우스개지만 “저는 사후에 유명해지면 됩니다”라고 말하고 다닌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게 다 나를 해하고 독을 뿌리는 거더라. 그땐 몰랐다. 뭐, ‘시니컬한 유머’가 있는 건 좋다. 하지만 인생 자체가 ‘시니시즘’이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한때는 그런 성향이 강했지만, ‘노래1’에서 “덧없어 놓아버린/인생의 앙금도”라고 썼듯 이제는 그저 흘러갔으면 좋겠다 싶다. 이건 내 바람이다. 남의 예를 또 들지만 얼마 전 30살 정도 되어 보이는 북유럽 기타리스트가 Carla Bley, Steve Swallow와 함께 연주한 ‘Lawns’ 영상을 봤다. 그 곡을 같이 연주한 후, 두 노인(Carla/Steve)이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귀신같은 앙상한 몰골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물론 그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주자이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저렇게 살 수 있다면 죽음을 맞이할 즈음 더 행복하겠다는 상상을 해 본 거다. 그렇게 ‘냉소가’에서 서서히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다. 요컨대, 기분이 좋은 ‘냉소가’인 걸로 해 두자(웃음).

About 이경준 (145 Articles)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글을 썼고, 하나둘씩 망해가는 잡지(웹진)들을 볼 때마다 역시 '이런 건 하면 안된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 또 이렇게 판을 키웠다. 왜 그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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