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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랜필드: 파란 그림

한낮에 꿈길을 걷다

제목에서 감지되는 것처럼 밴드의 시간대가 달라졌다. ‘밤의 악대’가 ‘한낮의 초청’을 받고 연주하는 느낌이랄까. ‘눈이 부시게’까지는 아니어도 그 톤이 연한 색으로 바뀐 것만은 틀림없다. [파란 그림]이라는 앨범 타이틀도 그렇고, ‘파이로’(1)-‘파랗네’(2)-‘코발트’(3)-‘표류기’(4)-‘파랑새’(5)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을 통해서도 낌새를 챌 수 있다. 한편 ‘파랑색’이 콘셉트라는 점은 (2), (3), (5)로부터 직관적으로 확인되며, (1)의 ‘파이로’라는 어감으로부터, (4)의 ‘바다’라는 상관물로부터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지향하는 드림팝, 브릿팝, 사이키델릭락의 틀이 확 달라진 것은 아니다. ‘꿈길을 걷는 듯한 분위기’는 유지된다. [파란 그림]은 [밤의 악대]가 보여주었던 먹먹하고 애틋한 크랜필드 특유의 음률을 여전히 담아내고 있다.

다만 선공개되었던 싱글 ‘파랗네’를 들어보면 이번엔 좀 더 멜로디 위주로 승부하겠다는 의욕이 드러난다. 마치 9와 숫자들의 미덕을 적절히 빌려온 것처럼 착각(음악이 똑같다는 말은 아니다)하게 만드는 곡의 진행과, 인트로부터 서서히 감상의 포인트를 쌓아나가는 신서사이저, 그리고 “거친 물이 마음을 가둘 동안/더 큰 물이 네 마음에 차오를 동안/너의 모든 슬픔이 사라지게/너를 안아줄게, 너를 안아줄게”로 달려가는 절정부. 곡을 듣다보면 앞으로 이런 식으로 전개될 것이라 충분히 예측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부할 수가 없다. 빼어난 팝송을 쓸 수 있는 밴드의 저력이다.

개인적으로 ‘밤의 악대’, ‘파피용’이 남기는 긴 여운을 좋아했다. ‘코발트’를 통해 유사한 느낌을 받는다. 읊조리는 듯 낭독처럼 독백처럼 다가오는 이성혁의 보컬과 기타 톤은 1990년대 중반 영국 어딘가에서 발현된 무드를 이곳으로 가져오는데, 단순한 모방이라기보다는 크랜필드만의 색깔이 그 텍스처를 뚫고 나간다는 생각이다. 네 번째 트랙 ‘표류기’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여유 있는 적적함. 그리고 공간감. 허나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은 오프닝 트랙 ‘파이로’다. 추리해보건대 아마 ‘파이로’란 ‘방화광(pyro)’을 일컫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로부터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보다 곡은 훨씬 은은하고 담백하다. 그게 오히려 곡을 깊게 각인하게 하는 요소다. 예전 우리의 밴드 11월의 곡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2월에 체크했던 국내음반 중 이 앨범을 첫 번째로 뽑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풀렝스를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흡족했으니까. 솔직히 [밤의 악대]가 재현해냈던 ‘안개 깔린 풍경’을 사랑했던 사람이 이번 EP를 좋아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 음반이 퀄리티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고, 2집의 방향성을 미리 보게 한다는 점에서 앨범은 그 의의를 가질 수 있다. 고유한 정서 혹은 자신만의 서정이 있다는 것은 뮤지션으로서 축복받은 일이다. ‘강요된 정서’가 임계점을 넘어 폭주하는 요즘, 우리에게 이런 밴드 하나 있다는 것 역시 작은 축복이다. 두 장의 음반으로 이제 그건 ‘사실’에 근접하고 있다.

3.5 Stars (3.5 / 5)

 

About 이경준 (145 Articles)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글을 썼고, 하나둘씩 망해가는 잡지(웹진)들을 볼 때마다 역시 '이런 건 하면 안된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 또 이렇게 판을 키웠다. 왜 그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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