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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r: The Magic Whip

얼음 같은 비장함과 은은한 퇴폐가 담긴 클래시컬한 단막극

전설 속의 이야기처럼, ‘마법’이 소환되기까지 시간은 꽤 많이 필요했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Blur의 컴백작이다. 2003년 [Think Tank] 이후 12년만의 귀환이다. 가상이 아니다. 심지어 기타리스트 Graham Coxon도 참여했다. ‘브릿팝’의 황금기를 직격하고 또 관통했던 오리지널 라인업이 거짓말처럼 다시 가동되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은 거짓말처럼, 우연처럼 점화되었다. 2013년 홍콩. 일정을 취소하고 닷새간의 짧은 휴식을 가지던 멤버들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편하게 악기를 잡았다. 긴 휴지기 끝에 발매된 베테랑들의 복귀작이 대개 열에 아홉 산으로 올라가는 이유는 뭔가를 보여줘야겠다는 강한 부담감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작품은 뒤로 밀려나고, 본인이 앞에 나서는 ‘전도’가 일어나게 되고, 커리어엔 하나의 오점이 더해진다. 다행스럽게도 밴드의 신작에는 그러한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리더 Damon Albarn의 최근 관심사인 일렉트로니카의 기운이 여전히 강하게 떠돌지만, 기본적인 자유분방함은 어디가지 않았기 때문에 [The Magic Whip]은 특정한 색깔로만 점철되지 않은 채 완성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음반은 만화경을 보는 듯 꾸며졌다. 마치 초창기의 어느 시점으로 역회전하는 듯한 첫 곡 ‘Lonesome Street’부터 신보의 성격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제목처럼 쓸쓸하고 우울한 무드가 있지만, 그 못지않게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코드가 저류에 흐른다. 이 양가적인 매력이 바로 Blur의 매력이 아닌가. 이어 도회적 멜랑콜리로 캔버스를 덮어버리는 ‘New World Towers’로 페이지는 넘어간다. 서정적 멜로디가 전편을 감싸더니 다시 ‘Go Out’으로 한 발 건너면 초점은 포스트펑크에 맞춰진다. 정신이 없지만 그런 두리번거림조차 백화점 세일기간의 혼란과는 다르게 받아들여질 만큼 곡들은 잘 정련되고 배열되어 있다.

이윽고, 가장 재미나게 감상했던 신보의 백미 중반부가 튀어나올 차례다. ‘Ice Cream Man’이란 곡에서 밴드는 프로그레시브의 표본 하나를 가져와 마음대로 자르고 휘고 변형하는데, 단순한 코드만으로도 얼마든지 흥미로운 결과물이 만들어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 트랙 ‘Thought I Was a Spaceman’의 문을 열면 이제 ‘평면’은 ‘입체’로 바뀐다. 공간감을 잔뜩 물먹은 키보드 사운드가 ‘21세기 스페이스락’의 구획을 규정하고 감정이 실리지 않은 듯 무심히 내리치는 실로폰이 고독함을 극대화한다. 6분에 달하는 대곡이지만, 멤버들의 ‘유희’가 어디까지 건드리고 있는지를 보게 하는 흐뭇한 트랙이다. 민감한 영혼을 지닌 팬이라면 필경 ‘My Terracotta Heart’를 그냥 지나치지 못할 것이다. 구슬픈 선율에 실린 Damon의 애처로운 보컬도 그렇지만, 쉽사리 멈추지 않을 듯 루프를 도는 비트가 뇌리를 계속 맴돌기 때문이기도 하다.

막바지로 와서도 페이스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유령선’이라는 이름을 배반하는 편안한 라운지 뮤직 ‘Ghost Ship’이 복고의 향기를 불러오는가 싶지만, 관심사는 재빠르게 화제의 싱글 ‘Pyongyang’으로 이동하는 것이 당연하다. 실제로 Damon의 평양 방문을 토대로 한 이 곡은 본인의 말처럼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느낌’보다는 ‘추상적이고 기이한 인상’에 뿌리를 두고 작곡되었다. 서구인의 눈에 비친 동양의 이미지가 어떻게 윤색되거나 왜곡되었는지는 여기선 다루지 않기로 한다. 이 리뷰는 정치사회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론만 요약하자면 노래는 앨범의 ‘첨점’이 되기에 부족하지 않은 고혹적인 팝송이 되었다. Morrissey의 얼음 같은 비장함과 Bryan Ferry의 은은한 퇴폐를 양손에 쥔 채로, Blur는 서서히 파장을 일으키는 단막극을 쓴다. 절정부를 노골적으로 지시하지는 않지만, 엔딩 크레딧의 여운이 긴 상당히 클래시컬한 드라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싱어롱을 대놓고 요구하는 ‘Ong Ong’를 살포시 깔고, [The Magic Whip]은 건조하고 텁텁한 Graham의 기타톤이 지배하는 ‘Mirrorball’로 마무리된다.

개인적으로는 [13]은 물론이고 [Think Tank]와도 비교불가의 작품이다. 통통 튀는 트렌디한 감각부터 1970~80년대를 흔들었던 장르적 서사와의 접촉까지. 그리고 옛 팬과 새로운 팬, 그리고 잠재적인 팬 그 누구에게도 집착하지 않으면서, 그 누구도 버리지 않는 영민함. Blur는 아직 이런 음반을 내놓을 수 있는 저력의 팀이라는 게 이렇게 입증되는 순간이다.

(4 / 5)

 

About 이경준 (145 Articles)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글을 썼고, 하나둘씩 망해가는 잡지(웹진)들을 볼 때마다 역시 '이런 건 하면 안된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 또 이렇게 판을 키웠다. 왜 그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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