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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i Hendrix: 어느 위대한 기타리스트 이야기

 

종종 천재는 신화가 된다. 요절한 천재라면 더 그렇다. 알다시피, 모든 천재에 얽힌 이야기가 사실 그대로인 것은 아니다. 문화산업의 모든 영역이 그러하듯이 거기엔 과장도 있고, 허풍도 있다. 요컨대, “눈으로 보이는 것이 모두 진실”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의 이야기를 말하면서 나는 조금도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고 싶지 않다. 그는 진짜로 ‘영웅’이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은 부식되어 간 여타 동료들과는 다르게 지금까지도 굳건히 ‘왕좌’를 지키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비단 이런 느낌을 ‘나만의 것’이라고 한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기타와 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Little Wing’을 들으며 기타리스트를 희망했고, ‘Purple Haze’를 들으며 그에 심취했고, 그리고는 ‘Voodoo Chile’을 들으며 기타리스트를 포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태생의 노름꾼 문학가가 수많은 문학청년에게 그랬던 것처럼 종국에 그는 하나의 벽으로 남았다. 그것은 누구도 감히 넘을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거대한 벽이었다. 뒤를 이은 것은 더 거대한 열등감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천재 또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고뇌했던 존재라는 사실을 흔히 간과하곤 한다. 굳이 살리에리(Antonio Salieri)의 예를 들 필요는 없다. 지미 헨드릭스 또한 태어나면서부터 ‘우주의 재능’을 갖고 태어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 역시 전형적인 ‘성장 스토리’를 밟은 아이였다. 빗자루를 들고 에어 기타를 치곤 했던 꼬마였으며, 아버지에게 죽도록 맞아가며 포기할 것을 권유받았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로 인식되는 기타를 불태우고, 이로 줄을 뜯고, 뒤로 돌려 연주하는 퍼포먼스는 사실 모두 타인의 것을 모방한 것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한 발 앞서 비기를 시도했던 부치 스나입스(Butch Snipes)와 알폰소 영(Alphonso Young)이 지미 헨드릭스보다 위대한 기타리스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본래 역사란 그러한 법이다. 타인의 재능을 흡수하고 그것을 체화하여 자신의 이름표로 만드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미의 청년기는 “헤드헌터(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쓰러뜨리려는 사람)”로서의 기간이었다. 결국 관건은 승부욕이었다. 제자가 자신을 넘어설 것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던 진정한 천재 조훈현이 이창호를 두고 ‘재능이 안으로 감춰진 천재’라고 했던 것처럼, 나는 지미도 그와 같은 ‘내적 천재’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스펀지 같은 흡수력에 타인보다 앞서려는 승부욕이 결합된 창조물. 기타의 완성형은 어쩌면 그때부터 예고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최고가 되려는 그의 열정이었다. 그는 지독한 연습벌레였다. 인터미션 중에도 색소폰을 불곤 했다는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처럼, 지미는 문자 그대로 하루종일 손에서 기타를 놓지 않았던 기타 중독자였다. 잠을 잘 때도 그는 ‘베티 진(Betty Jean, 그의 옛 여자친구이자 기타 이름)’을 배 위에 올려놓고 있었으며, 투어를 가는 차 안에서도 늘 기타를 만지작거리곤 했다. 한 흥미로운 에피소드는 기타에 대한 지미의 애착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지독한 연습광이었던 지미를 두고 그의 동료는 1962년의 어느 날 “아마 이제 눈감고, 뒤집어서, 등 뒤로 칠 수 있을 것”이라고 농을 걸었다. 정말로 그는 그렇게 연주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오직 연습, 연습 덕택이었다. 신화는 낮에도 밤에도 쓰이기를 멈추지 않았다.

 

DO NOT DELETE OR PURGE FROM MERLIN courtesy Everett Collection Mandatory Credit: Photo By MARC SHARRAT / Rex Features, courtesy Everett Collection THE JIMI HENDRIX EXPERIENCE VARIOUS - 1967 PERFORMING MARQUEE CLUB, LONDON - 02 MAR 1967 16987j He is playing a The 1965 Fender Stratocaster sunburst red/yellow without a whammy - bar and no sustainable pedals. this guitar was set on fire in LONDON in a concert at Finsbury Astoria in north London on March 31st, 1967 . This photo was taken 29 days before he smashed this guitar.

 

1960년대를 불태워 버린 가장 야성적이고 공격적이며, 우주적인 스케일의 기타는 그렇게 축조되었다. 그의 기타는 누구의 말마따나 “원시 섬의 와일드함”을 간직한 전대미문의 것이었고, 사이키델릭과 블루스, 재즈, 펑크(funk), 소울 등 모든 장르를 포괄하고 있었다. 동네 이웃들에게 전수받고, 수많은 클럽과 식당에서 다져지고, 슬림 하포(Slim Harpo), 비비 킹(B.B. King) 등 수많은 레전드를 따라하며 직조된 오직 그만의 브랜드였다. 동시에 ‘총천연색의 꿈’이 담긴 만화경이자, 에릭 클랩튼(Eric Clapton)을 좌절시키고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를 감동하게 한 비수이기도 했다. 심미안이 없는 사람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예리함을 가진 채, 그의 기타는 1970년 9월 한 호텔방에서 멈추기 전까지 흐르기를 멈추지 않는 영감의 원천으로 자리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자신의 기타만큼 마음에 들지는 않았었던 것 같다. 스스로 “노래하기 싫다. 난 결코 노래 잘 하는 보컬이 아니다”고 밝힌 것처럼 괴물에게도 아킬레스건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동의하겠지만, 탁월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노래 속에 선뜻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느낌을 살려내는 힘이 놀랍기만 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나는 기타리스트로서가 아닌 보컬리스트로서도 그가 재평가되기를 바라고 있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의 화려한 여성 편력과 마약 관련 비화만을 부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미 헨드릭스라는 대륙의 극히 일부이다. 잉베이 맘스틴(Yngwie Malmsteen)에게 그랬고, 스티비 레이 본(Stevie Ray Vaughan)에게 그랬고, 일일이 언급할 수 없는 무수한 기타리스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지미 월드’는 직접 ‘겪어 보지 않고서는(are you experienced?)’ 그 실체를 알려주기를 꺼려하는 것이다. 앞으로 그가 계속 유의미할 수 있다면, 절대적으로 그런 의미에서라는 것을 나는 느낀다. 말하자면 그는 결코 ‘스캔들’ 따위가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 이 곳에 쓰고 있는 그에 대한 모든 말들은 수식과 부연이다. 한 가지 양해를 구하자면, 모든 위대한 자에 대한 일대기는 결국 그렇게 되어버리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당신이 지미 헨드릭스의 문을 열었을 때, 밀려오는 것은 이 ‘거칠고 우울한 천사(wild blue angel)’가 뿌려놓은 지독하고 치명적인 포말이다. 어쩌면 종교적인 체험이 될 수도 있을 그 경험은 너새너이얼 웨스트(Nathaniel West)가 잘 지적했듯, 잠 이루지 못하게 할 ‘신열의 도착’으로 감상자를 전율케 하리라.

 

* 예전 ‘다음뮤직’에 기고했던 글을 수정해 실었습니다.

About 이경준 (145 Articles)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글을 썼고, 하나둘씩 망해가는 잡지(웹진)들을 볼 때마다 역시 '이런 건 하면 안된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 또 이렇게 판을 키웠다. 왜 그랬니?

1 Comment on Jimi Hendrix: 어느 위대한 기타리스트 이야기

  1. 잘 읽었습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들 기대하겠습니다~!^^
    이글 읽고 간만에 삘 받아서 Fillmore East 앨범 듣는중입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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