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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lican: The Cliff

작가란 자기 문체를 가져야 하는 법

포스트메탈이라는 장르를 논하면서 Pelican의 이름을 먼저 거론하는 데 주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포스트메탈이란 1990년대 중반 발원한 장르로 포스트락/슈게이징의 문법을 기반에 두고, 그 위에 헤비니스의 강렬함을 얹은 음악을 지칭한다. 2000년 미국 일리노이에서 결성된 4인조 포스트메탈 유닛 펠리컨은 그간 5장의 정규작과 그 이상의 EP, 그리고 여러 밴드들과의 스플릿 음반을 발표하며, 장르 내부의 형식미를 구축하고 완성해왔다. 특히 2대의 기타로 생산해내는 묵직한 리프와 변칙적이면서 다채로운 서사 구조는 밴드를 가장 독창적인 이 계열 아티스트로 만들어주는데 크게 기여한 요인이었다. 그러면서도 아트 스쿨의 일원임을 강조하는 트랙들의 서정성은 가히 1류 선수의 솜씨 그것이었다. [The Fire in Our Throats Will Beckon the Thaw], [City of Echoes], [What We All Come to Need]는 그 모든 것을 담아낸 포스트메탈의 수작으로 기록되고 또 기억되고 있다.

EP [The Cliff]는 2013년 정규 [Forever Becoming]을 발표한 후 내놓는 첫 번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곰곰 뜯어보면 이걸 EP라 불러야 할지 의문스럽긴 하다. [Forever Becoming]에 실렸던 싱글 ‘The Cliff’를 3개의 버전으로 변주했고, 거기에 ‘The Wait’라는 신곡 하나를 넣어 릴리즈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밴드의 하드한 팬에게는 굉장히 성의 없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 한국 가수들이 자주 써먹는 보컬 트랙/인스트루멘탈 트랙 이원화 전략(이라고 쓰고 분량채우기라고 읽는)처럼, “여러분, 우린 지금 시간을 때우고 있답니다” 식의 인상을 남기지는 않지만, 앨범을 평가할 때 이것이 ‘플러스 요소’로 작동하기란 경험상 매우 어려운 일임을 알 수 있다.

물론 Pelican은 영리한 밴드다. 곡들을 점검해보면 쉽게 확인된다. 거의 보컬을 사용하지 않는 이들이 정말 간만에 인간의 목소리를 집어넣은 채 공개한 첫 번째 ‘The Cliff’는 보컬의 기-승-전-결을 앞세운 상투적인 드라마가 아니다. 낮게 강하하며 주문을 읊조리는 식으로 진행되는 보컬은 곡의 보조 장치처럼 보인다. ‘Who do you love?’를 반복하는 저 가사가 100%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초반부의 둔중한 드론 사운드와 슬러지메탈의 내러티브를 도입한 듯한 전개방식은 제법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인더스트리얼메탈의 파이오니어 Godflesh의 멤버 Justin Broadrick이 리믹스를 맡은 두 번째 ‘The Cliff’는 신스와 베이스의 두꺼운 막을 형성하는 듯한 스산한 라인이 불거진 곡으로, 첫 번째 트랙과의 차별점을 분명히 한다. 변이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밴드 Palms의 Aaron Haris와 Bryant Clifford Meyer가 참여한 세 번째 ‘The Cliff’는 가장 역동적이면서, 활발한 운동성을 자랑하는 트랙인데, 전작들을 들었던 사람이라면 “이게 Pelican 음반이야?”하면서 CD 재킷을 쳐다봄직한 곡이다.

그런데, 정작 나는 메인보다는 후식처럼 붙어 있는 ‘The Wait’에 눈길이 간다. ‘The Cliff’ 트릴로지가 좀 설득력 없이 짜인 것 같은 맛도 있거니와, 이 스타일의 연주가 Pelican의 장기에 더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 ‘원래 하던 것만을 연주하라’는 규범은 없지만, 이 말은 “뭐가 더 밴드의 정체성을 대변하기에 좋은가?”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잔잔한 여울로 시작하다가 중반부부터 기타와 베이스, 드럼이 커다란 파동을 이루는 ‘약간은 티피컬한 설계’를 가진 곡이기도 하지만, 나는 이런 느낌을 내는 Pelican이 좋다. 레이먼드 카버나 존 치버의 소설을 펼칠 때 기대하는 것과 비슷한 거라고 해두자. 작가란 자기만의 문체가 있는 법이다.

세 번의 갸우뚱과 한 번의 끄덕임. 그래서, EP도 하나의 음반이라고 보았을 때, 나(억지로 팬임을 숨기지도 않았지만)는 이번 작품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없음을 고백한다. 그렇다고 밴드에 대한 애정을 접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 정도로 최악의 음반도 아니거니와, [The Cliff]는 사실 이 음반을 가지고 밴드를 알게 되었다면 오히려 더 신기해할 수도 있을 앨범이기도 하다. 하지만 개인적인 심정으로는, 어서 새 풀렝스가 나왔으면 한다.

(2.5 / 5)

 

About 이경준 (145 Articles)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글을 썼고, 하나둘씩 망해가는 잡지(웹진)들을 볼 때마다 역시 '이런 건 하면 안된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 또 이렇게 판을 키웠다. 왜 그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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