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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P. Keith Emerson 1944-2016

The Last Keyboard Mantic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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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ith Emerson이 불세출의 키보디스트였다는 점에 이견을 다는 이는 아마 없겠지만,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좋아한다고 단언하는 이도 아마, 그만큼은 물론 아니더라도 찾아보기는 어렵겠지 싶다. 어쩌면 지금 글을 쓰고 보는 입장의 이들이야 가늠할 수 없겠지만 아마도 외로웠을 마지막을 맞은 건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그건 Keith Emerson의 문제라기보다는 Emerson, Lake & Palmer(이하 ELP)의 문제였을 것이다. 혹자는 프로그레시브 락의 3대 밴드라고 얘기하기도 했을 정도로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지만, Yes나 King Crimson, Pink Floyd 같은 장르의 거인들에 비할 만큼 뛰어난 기량을 오래 유지하지는 못했다. Emerson 스스로도, Rick Wakeman이나 Vangelis, Eddie Jobson 같은 이들이 밴드를 떠나서도 보여주었던 번뜩임을 ELP 이후에는 거의 보여주지 못했다는 게 중평이다(꼭 거기에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다). 화려함은 시간의 흐름 가운데 망각의 먼지를 뒤집어써 버렸고, 언제부턴가 생각보다 많은 이들은 Keith Emerson을 클래식을 이용해 창작의 빈틈을 메꾸려 했던 이처럼 기억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Keith Emerson이 클래식에 매몰된 뮤지션이 아니었다는 점은 당장 ELP의 작품들만 살펴보더라도 알 수 있으니 저런 기억들이 생기는 건, 이해를 전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망자로서는 억울할 일이다. 클래식을 공부했지만 Keith Emerson은 동시대의 락큰롤이나 리듬 앤 블루스, 재즈 등의 음악에도 충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가 밴드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Gary Farr & T-Bones는 이후의 ELP와는 거리가 멀었던 리듬 앤 블루스(아무래도, Brian Jones가 힘있던 시절의 Rolling Stones)에 가까운 음악을 연주했다. 하긴 Gary Farr는 지금에 와서야 Keith Emerson의 인지도에 비할 바는 아닌 인물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T-Bones는 Moody Blues나 The Animals와 같은 거물들과 같은 무대에 설 수도 있었다. 클래식을 공부하기는 했지만 Keith Emerson은 클래식 이전에 기본적으로 블루스, 락큰롤 키보디스트였던 셈이다. The Nice도 지금에서야 ‘오르간 록’이라는 식으로 기억되기는 하지만, Keith 외에는 전부 T-Bones의 멤버로 이루어진 밴드가 블루스를 벗어날 수 없었다. Keith는 적어도 The Nice의 활동 초기까지는, 분명히 블루스 키보디스트였다.

 


‘Together Forever’. Keith Emerson이 T-Bones와 녹음한 싱글은 이게 유일했지만 당시에는 발표되지 못했다. 물론 지금이야 영미의 괴수들이 음원을 어떻게든 구해서 앨범으로 발매했다([The Many Faces of Emerson, Lake & Palmer(A Journey Through the World of ELP)])
 
그랬던 Keith Emerson이 본격적으로 클래식 무드를 보여주기 시작했던 것은 [Ars Longa Vita Brevis]부터일 것이다. 물론 The Nice는 본격적인 ‘오르간 락’을 의도했던 밴드는 아니었지만, 기타를 연주하던 David O’List가 빠져나갔으니 사운드의 중심은 이제 Keith Emerson의 건반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본격적으로 밴드는 그 구상에 Bach와 Sibelius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ELP는 사실상 ‘프로토타입’이었던 [Ars Longa Vita Brevis]를 최고의 멤버들과 완성형으로 발전시키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물론 그 성과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The Doors나 Monkeys도 있었지만, 무그를 밴드의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한 것은 Keith였고, 이 새로운 기술을 통해 Keith는 낭만파에서 Bartok풍의 강한 ‘타격감’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연주를 Greg Lake의 팝적인 감수성이 깃든 걸출한 보컬과 버무려 새로운 ‘클래식’을 들려주기 시작했다(사실, 어떤 면에서는 Keith Emerson보다는 Rick Wakeman이 더 ‘클래시컬’한 키보디스트였을 것이다. 바로크나 낭만파, 또는 20세기의 음악을 주로 참고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도약 진행을 이용했던 Emerson에 비해서 Wakeman은 확실히 ‘고전’적인 연주를 보여주는 편이었다). 초기 신서사이저가 아직은 극복할 수 없었던 엄청난 크기와 중량마저 무대에서 그만의 화려하면서도 ‘영웅적인’ 이미지에 기여할 뿐이었다. 적어도 모두가 기억하고 있는 그 몇 년간, Keith Emerson은 가장 혁신적이면서도 ‘남성적’이었던 락 음악 최고의 히어로였다.

그러고 보면 이후 Keith Emerson이라는 이름을 많은 이들의 기억에만 남겨두도록 한 것은, 결국은 시간이었다. ELP가 가장 화려했던 시기를 끝낸 이후에도 Keith Emerson은 꾸준하게 새로운 활동을 모색했지만 ELP에 비견할 만한 성취와 상업적 성과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ELP만큼은 아니더라도 Emerson, Lake & Powell은 ‘Mars, the Bringer of War’를, 3는 ‘Desde la Vida’를 내놓았으니 나름 최소한의 성취는 있었던 셈이지만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아마 그 정도 성취로는 락의 영웅이었던 Keith Emerson 스스로도 납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밴드 활동 이외에 선택했던 영화음악의 길도, 어쩌면 다른 이도 아닌 Keith Emerson에게는 어울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Inferno]에서의 연주는 자체로는 인상적인 면모를 보여주면서도, Argento의 영상을 전혀 받쳐줄 생각이 없다(아니, 때로는 영상을 잡아먹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영화음악으로서 인상적인 성과는 음악이 잡아먹을 수 없을 정도로 린 타로가 탁월한 시각적 연출을 선보였던 [Harmageddon]이었다. Keith Emerson은 이야기의 중심에 선 영웅으로서 음악을 해야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셈이다. 물론 한동안 차트를 가보지 못한 영웅에게 쉬이 무대를 내어줄 시기는 지나가 있었다.

 


Challenge of the Psionic Fighters. 솔직히 ELP를 제외한 Keith Emerson의 최고작은 [Harmageddon]일지도.
 
그렇지만 영웅을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의 퇴락한 어깨에서 먼지를 한결 털어내면, 이제는 아무도 재현하지 못할 가장 빛났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건 의문의 여지가 없다. 좁은 음악편력 탓일 수도 있지만, 나는 Keith Emerson 이상으로 밴드와 청중을 지배하고 스스로의 캐릭터를 과시할 수 있었던 키보디스트를 알지 못한다. Keith Emerson은 락이 정점을 이루던(또는 그렇게 평가되던) 시절, 다른 이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홀로 ‘락 스타’일 수 있었던 유일한 키보디스트였고, 아마 새로운 시대에 그런 지점에 이를 인물이 나오기는 아마 어려울 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이지만, 아마 한 시대가 확실히 마무리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입맛이 조금은 쓰다. 제때 나왔어야 하는데 조금은 글이 늦어져서 더욱 아쉽다. 늦었지만 고인의 명복을 빈다.

 

About 빅쟈니확 (83 Articles)
워리어 알통 터져 죽었다는 기묘한 부고기사에 눈물지으며 메탈을 듣던 머리 큰 아이가 나이가 들어서도 메탈을 끊질 못하다가 결국은 글까지 쓰고 있다. 뭔가 흐름이 괴상한 것도 같지만 인생이 뭐 그렇지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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