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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apy?: Disquiet

어느 똘끼어린 펑크 키드의 생애

이들이 지금까지 살아있으며, 더구나 꾸준히 앨범을 발표하고 있다는 ‘팩트’에 놀랄 분들이 있을 줄로 안다. 기껏해야 한국에서 Therapy?라는 이름이 인지도가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쓰레기통에 상반신을 구겨 박은 저 음반 [Troublegum]의 공이다. 엄밀히 말해, 그건 꼭 국내에만 한정된 현상은 아니다. 1994년 얼터너티브가 전세계를 지배했을 때, 지상으로 툭 튀어나온 이 음반은 얼터너티브락과 펑크, 하드코어, 헤비메탈을 내가 아는 한 가장 능수능란하고 교묘하게 결합한 작품이었고, 현재까지도 밴드 최고의 ‘magnum opus’(혹은 얼터너티브 씬이 배태한 제 1의 ‘저주받은 걸작’)으로 남았다. 솔직히 [Troublegum]을 처음 들었을 때는 Misfits에 Hüsker Dü를 떡칠한 후, Social Distortion이나 Prong을 살짝 짜서 넣고 휘휘 저으면 이런 음반이 될까? 생각했으니, 당시 고만고만한 음반들에 지쳐가던 씬에 이 앨범이 주었던 임팩트란(라고 적었지만 어디까지나 일부에게 한정된 이야기. 사실 대중들 사이에서는 임팩트고 나발이고 없었지)! 특히, ‘Knives’-‘Screamager’-‘Hellybelly’로 이어지는 흐름은 범접불가의 3연타였다.

그러나, 100만장 이상의 세일즈는 이미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고, Therapy?는 이제 레이블을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음반을 찍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뭐, 이래저래 애매한 성공을 거둔 락 밴드의 미래는 한국이나 해외나 유사하다). 이번 음반은 Amazing Record Co.라는 독립레이블에서 발매되었는데, 밴드가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이동하는 와중에 스튜디오 음반의 개수도 스멀스멀 14개가 되었다. 씬의 베테랑이 아니라 씬이 없어진 나머지 갈 곳이 없는 복덕방 노인네가 되어버린 셈이다(씬이란 놈이 실체가 있기나 해야 말이지). 먼저 앨범 재킷이 팍 박힌다. 빨간색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벽에 고개를 쳐 박은 모습. [Troublegum]의 인상과 사뭇 닮지 않았나. 돌이켜보니 weirdo의 아이콘은 모 밴드가 아니라 어쩌면 Therapy?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플레이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의 반응과는 관계없이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겠다”는 고집스러움이 직관적으로 느껴진다. 마음에 든다. 예전부터 ‘똘끼’는 먹어주던 밴드였지 않나. 그걸 20년 넘게 지켜온다면 이건 치기 따위가 아니라 장인정신이다.

첫 ‘Still Hurts’가 나오는 순간, 앗! 요건 21년 전 [Troublegum]의 재현이다. 물론 조금 다른 형태이지만, 전작 [A Brief Crack of Light]에서는 감지하기 힘들었던 에너지다. Therapy?라면 마치 Rage의 현현을 보는 것처럼 타협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극한의 원초성이 장기였는데, 바로 이 곡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연결되는 ‘Tides’는 밴드가 멜로디 메이킹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것을 각인시켜주는 트랙인데, 바로 [Troublegum] 앨범에서의 ‘Nowhere’ 같은 곡을 떠올려보면 될 것이다. ‘These tides leaving me behind/Day by day by day/Your life waving out mine/Wave by wave by wave’. 후렴부분은 최근 메인스트림 락 씬의 밴드가 공개한 싱글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정도의 흡인력을 자랑한다. ‘킬러 싱글’을 쓸 수 있는 재능, 그리고 본인의 본령과 그 재능을 무리 없이 합일시킬 수 있는 뻔뻔함. 꼰대처럼 일갈하자면, 이거 실력 안 되는 것들은 죽어도 못 한다.

그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묵직한 리프로 곡을 끌어가는 ‘Fall Behind’를 보라. Helmet의 약간 순화된 버전인 듯, 헤비한 사운드가 듣는 이를 쥐락펴락한다. ‘Idiot Cousin’의 중도적 노선은 약간 고개가 갸웃하지만, 다크한 무드의 ‘Helpless Still Lost’를 확인하니 다시 안심이 된다. ‘Insecurity’는 내가 애정을 아끼지 않는 미니멀한 하드코어/펑크다. 허나 이 양반들 역시 전형적인 진행을 거부한다. 보통 30초 남짓 들으면 앞으로의 전개를 예측해볼 수 있는데, 설마 템포가 이렇게 바뀔 것으로는 예상하지 못했다. 재미있다. 다음 곡은 ‘Vulgar Display of Power’. 푸핫. 이 미친 개그감을 보고도 빵 터지지 않는다면 Pantera를 모르거나, 아니면 선천적으로 무감각한 인종인 거라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다. 암튼 연주는 Pantera와는 무관하다(헤비리프야 있지만). 요로코롬 센스 터지는 드립력이 있기에, 내가 이 밴드를 기억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점점 이 음반이 좋아져가던 나를 제일 강력한 손길로 사로잡은 트랙은 마지막 곡 ‘Deathstimate’다. 2~3분으로 곡 하나를 조지던 평소의 애티튜드에 저항하며(이래서 더 마음에 든다) 7분짜리 에픽을 썼다. 이 곡은… 설명하자면 펑크 밴드가 연주하는 둠메탈을 듣는 것 같다(돈은 벌 만큼 벌었다 이거지). 뭔 말 같지 않는 소리냐 하겠지만, 저 당장에라도 비 내릴 것 같은 음산한 분위기와, 주술을 거는 듯한 Andy Cairns(vox&guitar)의 음성만으로도 상상이 가능하다. 거기에 그와 세월을 함께하며 그와 한 몸처럼 움직이는 듯하는 Michael McKeegan(bass)와 Neil Cooper(drums)의 노련한 연주가 더해지니, 뭐 더 할 말이 없다.

자신이 등정했던 봉우리를 영원히 넘어서지 못하는 밴드들이 있다. [Troublegum]이란 거대한 방점을 찍어놓은 Therapy?의 생애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픽 웃어 넘겨서는 안 된다. 방심하고 있다가 카운터 한 방 제대로 맞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치열하고 성실하게 음악에 헌신해온 트리오가 간만에 훈훈한 음반을 냈다. 밴드 말기의 이례적 증후인지, 사고 하나 쳐 보자는 독기가 만들어낸 결과물인지는 체크할 길이 없다. 그것도 아니라면, 운명의 신이 노장 예우차원으로 한복판에 던진 직구를 잘 받아친 극적인 한 방인가? 리스너 입장에서야 셋 중 뭐라도 환영할 일이다.

4 Stars (4 / 5)

 

About 이경준 (145 Articles)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글을 썼고, 하나둘씩 망해가는 잡지(웹진)들을 볼 때마다 역시 '이런 건 하면 안된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 또 이렇게 판을 키웠다. 왜 그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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